하룻밤에 사라진 2만 5천 명의 노후
2001년 12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 거대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회사의 이름은 엔론(Enron)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회사는 경제 잡지 포춘이 6년 연속으로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한 곳이었다. 주가는 한때 90달러를 넘나들었고,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앞다투어 매수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신화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주가는 1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2만 5천 명에 달하는 직원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많은 직원이 노후 자금 대부분을 회사 주식으로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회사가 무너지자 그들의 은퇴 계좌도 함께 휴지 조각이 되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엔론은 어떻게 이토록 순식간에 무너진 것일까. 그리고 완벽해 보이던 이 회사는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엔론이라는 회사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던 곳이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에너지 회사가 아니라 숫자를 파는 회사
엔론은 원래 천연가스를 사고파는 평범한 에너지 회사였다. 그러나 컨설턴트 출신의 제프리 스킬링이 합류하면서 회사의 정체성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석유와 가스를 직접 캐고 나르는 낡은 방식 대신, 에너지를 마치 주식처럼 사고파는 회사로 엔론을 재편했다. 공장도 창고도 필요 없이 계약과 숫자만으로 돈을 버는 구조였다. 문제는 이익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엔론은 시가 평가 회계라는 기법을 동원해, 앞으로 20년 동안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수익을 계약을 맺은 바로 그 순간 전부 이익으로 장부에 적었다. 아직 한 푼도 들어오지 않은 미래의 돈을 오늘의 이익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편의점 사장의 20년치 매출
이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해하려면 간단한 비유가 필요하다. 편의점을 열기로 계획만 세운 사장이, 앞으로 20년 동안 팔 것으로 예상되는 매출을 오늘 통장에 찍힌 것처럼 장부에 미리 적는다고 상상해 보자. 서류상으로 이 사장은 엄청난 부자다. 하지만 실제 금고에는 단 한 푼도 없다. 엔론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해마다 이익을 부풀렸다. 예상 수익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잡을수록 장부상 이익은 커졌고, 주가는 그만큼 더 올랐다. 경영진의 보수와 스톡옵션 역시 주가에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에게는 숫자를 더 크게 부풀릴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화려한 숫자 뒤에서 아무도 소리 내어 묻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손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믿기 힘든 붕괴의 숫자
엔론의 몰락을 숫자로 보면 그 규모가 더욱 실감 난다. 한때 900억 달러에 이르던 기업 가치는 파산 무렵 사실상 0으로 무너졌다. 주가는 90달러에서 1달러 아래로 추락했다. 파산 당시 회사가 안고 있던 자산은 634억 달러로,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 파산이었다. 회사를 믿었던 주주들이 잃은 돈은 무려 740억 달러에 달했다. 이 거대한 숫자들이 단 몇 달 만에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천재로 불린 남자, 제프리 스킬링
엔론 신화의 중심에는 제프리 스킬링이 있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나온 그는 컨설팅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 엔론에 합류했다. 그는 에너지를 주식처럼 거래한다는 파격적인 발상으로 월가를 사로잡았고, 순식간에 시대의 천재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은 혁신만이 아니었다. 스킬링은 직원들에게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곧바로 해고되는 냉혹한 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하위 평가를 받은 직원은 주기적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 제도는 직원들 사이의 경쟁을 극단으로 몰아붙였고, 단기 실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리한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었다. 모두가 더 큰 숫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그 압박은 회사 전체를 숫자에 대한 집착으로 몰아넣었다. 겉으로 드러난 성장의 속도는 눈부셨지만, 그 화려함 뒤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을 감추는 일은, 회사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장부를 보여주기를 거부한 순간
2001년 봄, 한 애널리스트가 실적 발표 통화에서 회사의 자산과 부채를 정리한 기본 자료를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느 회사에나 있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런데 스킬링은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대신 상대를 조롱하듯 쏘아붙였다. 회사의 가장 기본적인 장부조차 투명하게 보여주기를 거부한 그 순간이, 훗날 돌아보면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첫 신호였다. 투자자들이 그 신호를 제대로 읽어냈다면 비극의 규모는 훨씬 작았을지도 모른다.

빚을 숨긴 유령 회사들
엔론이 손실과 빚을 숨긴 방법은 놀랍도록 치밀했다. 재무 책임자 앤드루 패스토우는 회사 바깥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 이른바 특수목적법인을 수백 개나 만들었다. 그리고 엔론의 골칫거리가 된 부실 사업과 막대한 빚을 이 유령 회사들에게 차곡차곡 떠넘겼다. 그러면 엔론의 장부에서 빚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겉으로는 더없이 건강한 회사처럼 보였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패스토우가 이 유령 회사들을 직접 운영하며 수천만 달러의 개인 이익까지 챙겼다는 점이다. 장부를 감시해야 할 회계법인마저 막대한 수수료 앞에서 눈을 감았다. 원래대로라면 회계법인은 기업의 장부가 정직한지 감시하는 최후의 파수꾼이어야 했다. 그러나 엔론에서 받는 컨설팅과 감사 수수료가 워낙 컸기에,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했다. 감시자여야 할 사람들이 모두 이 위험한 게임에 함께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령 회사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숨어 있었다. 엔론의 주가가 떨어지는 순간, 숨겨둔 빚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겉모습과 진짜 모습의 간극
세상이 본 엔론과 장부 속 엔론은 전혀 다른 회사였다. 서류상 엔론은 매년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내는 우량 기업이었고, 경영진은 스톡옵션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장막 뒤의 진짜 엔론은 유령 회사에 떠넘긴 수십억 달러의 빚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었다. 이 화려한 겉모습을 유지하려면 주가가 끊임없이 올라야만 했다. 유령 회사에 숨겨둔 빚은 엔론의 주가가 떨어지는 순간 한꺼번에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해 보이던 성장은 사실 멈추면 곧바로 쓰러지는 자전거 위의 위태로운 곡예에 불과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도록 되어 있었기에, 엔론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질주가 끝나는 날, 감춰졌던 진실이 한꺼번에 드러날 운명이었다.

단 몇 달 만의 붕괴
2001년, 완벽했던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해 8월 스킬링이 개인적인 이유를 대며 갑자기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고의 순간에 선장이 배를 떠난 것이다. 두 달 뒤인 10월, 엔론은 6억 달러가 넘는 분기 손실과 12억 달러의 자기자본 감소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곧이어 증권 당국이 조사에 착수했고, 11월에는 지난 몇 년간의 이익이 부풀려진 것이었다고 스스로 실토했다. 마지막 희망이던 경쟁사와의 합병마저 무산되자 주가는 완전히 붕괴했다. 그리고 12월 2일, 엔론은 끝내 파산을 신청했다. 신화가 무너지는 데는 단 몇 달이면 충분했다.

가족처럼 믿었던 직원들의 절망
엔론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회사를 진심으로 믿었던 평범한 직원들이었다. 엔론은 직원들에게 은퇴 자금 계좌를 회사 주식으로 채우도록 권장했고, 많은 이들이 이를 애사심으로 받아들였다. 정년을 앞둔 직원들은 수십 년간 모은 노후 자금 대부분을 엔론 주식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주가가 무너지던 결정적인 며칠 동안, 회사는 직원들이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계좌를 묶어버렸다. 정작 경영진은 그 전에 자기 주식을 팔아 수억 달러를 챙긴 뒤였다. 눈앞에서 평생 모은 돈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직원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회사를 믿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던 그들에게, 그 믿음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내부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경영진에게 문제를 제기한 직원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조직의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 결국 2만 5천 명이 같은 절망을 겪어야 했다.

거짓말이 무너뜨린 것들
엔론이 남긴 상처는 회사 하나에서 끝나지 않았다. 엔론의 회계를 담당하던 세계 최대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은 관련 증거 서류를 파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세계적인 회계법인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천재로 불리던 스킬링은 여러 건의 사기와 공모 혐의로 24년 형을 선고받았고, 형량은 이후 일부 조정되었다. 재무 책임자 패스토우 역시 유죄를 인정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기업 회계를 훨씬 엄격하게 감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상장 기업의 경영진이 재무제표의 정확성에 직접 책임을 지도록 하고, 회계 감사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엔론 사태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제도들이다. 하나의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대가를 결국 누가 치르게 되는지, 엔론은 값비싼 대가로 똑똑히 보여주었다. 화려한 혁신의 이름 뒤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묻지 않은 대가는 너무나 컸다.
마치며 — 완벽한 숫자를 의심하라
엔론의 이야기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투자와 회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첫째, 어떤 회사의 실적이 지나치게 완벽하고 꾸준하다면 그 뒤에 감춰진 것이 없는지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 현실의 사업에는 늘 오르내림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회사가 가장 기본적인 장부조차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한 위험 신호다. 셋째, 아무리 좋아 보이는 회사라도 자신의 모든 노후 자금을 한 곳에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엔론의 직원들이 뼈아프게 배운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부터 어떤 기업이 기적 같은 성장을 자랑한다면, 그 화려한 숫자 뒤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져보자.